좋은 예배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예배찬양사역

좋은 예배는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시작이 절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생각하고 있는 것을 ‘시작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뜻으로, 시작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들에게는 큰 용기를 주기도 한다. 시작이 전체의 반이라니...이토록 큰 격려가 어디 있냐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시작한 사람에게 이 말은, ‘이미 절반까지 왔고 돌아가려도 해도 절반이니 아예 돌이킬 생각은 말라’는 뉘앙스로 들리기도 한다. ‘남은 절반을 처음에 시작한 것처럼 최선을 다해 가라’는 뭐 그런 종용의 말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오늘 ‘시작이 절반이다’라는 말을 좀 더 설득력 있게 바꾸고 싶다. 어떻게?

‘좋은 시작은 절반이다’라고 말이다!

나는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좋은 일인가’, ‘최선인가’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 향방 없이 무작정 시작 하면 좋다는 말이 아닐 것이기에 그렇다. 올바르게 시작해야 끝도 좋을 수 있다. 처음이 좋아야 절반의 가치도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배모임의 시작을 가지고 이야기 해보자. 이번 주일에도 얼마나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을까? 한국에서만 5만 5천개의 교회, 4백에서 5백 만 명 정도의 교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배인도자의 예배 초청의 멘트든, 찬양대의 입례송이든, 묵도(묵상기도)와 함께든... 그렇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도들은 예배가 좋은 출발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도 말이다.

그럼 어떻게 예배를 시작해야 좋은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서 신학적인 전제들을 다 나열하고 싶진 않다. 다만 목회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예배의 좋은 시작에 대해서 몇 가지 아이디어만 제공할 생각이다. 다른 말로 좋은 예배모임의 시작에 도움이 되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 듯싶다.

첫째, 환영 받고 있다는 느낌

오는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반갑게 맞아주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복음서에서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의 아비는 그의 잘못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고 한없는 사랑을 보여 준다.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했지만 돌아왔다 그 하나만의 이유만으로도 기꺼이 그를 안아준다. 그가 얼마나 세상을 즐겼던 자인가, 그가 얼마나 누추해진 모습인가를 보지 않는다. 그냥 아버지의 집에서 용납 받는 것이 필요하다. 아비와 같은 리더들이 이와 같은 것을 해주면 좋다. 이러한 용납과 환영의 분위기는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될 수 있다. 예배당에 들어와서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담임목회자로부터 반갑게 맞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찾아온 누구든 자신을 위해 준비된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둘째,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느낌

사실 예배당을 찾았을 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할지 우리는 짐작해 볼 수 있다. 최소한 한 가지는 해결 받고 싶어서다. 양심이 소리치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에 ‘은혜를 받으러 나온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저렇게 치장을 하고 나왔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넝마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을 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리고 싶어서인지 모른다.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간신히 배를 채우던 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이렇게 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춤군의 하나로 보소서” 아들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의 죄를 후회하고 있었다. 조그만 도와주면 된다.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셋째, 축복 받는다는 느낌

너무 속되다고 욕하지 마라. 축복 받고 싶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까? 우린 누군가를 축복해 주도록 지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이다. 축복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축복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복에 대한 과용과 기복신앙이 문제이지, 우리는 복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 현자는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축복(beautitude)의 진정한 의미는 건강과 풍요를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니며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믿음에 대한 보증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축복의 진정한 의미는 천국에서 성도들이 맛보는 완벽한 행복과 내적 평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물질이 가져다주는 행복과 기쁨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과 평강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축복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고요함을 의미한다. 돌아온 아들이 무엇을 누렸는지를 보라. 가장 큰 복은 아버지와의 회복된 관계이며 그로 인한 생명과 부유함이었다.

난 이 내용을 순서로 그대로 표현한 적이 있다. 교회 리더들과 상의해서 예배시작 시간 15분전부터의 시간을 할애 받았다. 예배와 예배모임 사이의 시간의 간격과 예배당이 고층이라는 건물의 여건상 교인들 모두가 쉽게 그 시간에 맞춰 올 수는 없었지만, 그곳에 있었던 이들과 예배함에 있어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도록 인도했다.

15분속의 세 가지 요소를 어떻게 반영 했을까? 환영의 요소는 노래 선곡을 통해서였다. 두 곡의 노래(찬송가)를 선곡 했는데 원칙이 있었다. ‘절대 새로운 노래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사만 주어지면 모두가 눈을 감고 부를 수 있는 곡을 선곡 한다’, ‘회중의 1/3 정도는 이 노래가 자신의 18번이 되는 노래이다’... 물론 첫 노래부터 눈물을 보이는 교우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참석자 대부분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예배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처음 두 곡을 마음을 다해 열심으로 불렀으니, 이제부터는 조금 익숙하지 않은 노래도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요소인 회개와 축복은 기도를 통해서 반영했다. 두 가지 기도를 하게 되는데 하나는 한 주간의 죄를 자복하는 회개의 시간이다. 이 문제는 예배자에게 모두 중요한 문제다. 그러기에 늘 간절함이 묻어났다. 처음부터 다른 이들을 위한 기도는 마음을 실기가 쉽지 않다. 두 번째 기도는 더욱 간절해진다. 자신의 기도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한 축복의 기도이니 더욱 그럴 것이다.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지를 기도제목과 함께 나누면 예배에 참석자들은 소리를 내어 기도하기 시작한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가 자신을 위한 축복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작한 예배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느낌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이 내 아이디어다. 예배 중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은 인도자의 기도의 몫이다.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면 수일 금식을 해서라도 해결해야 한다. 교회 목회자는 이것 때문에 세워진 것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WE 미디어센터 www.wemedia.kr

최근글


새댓글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