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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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두기’ 주일예배
이렇게? 흥미로운 한 콘서트의 장면이다. 음악을 연주하는 자나 참여자 모두 일정한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는 개별 풍선 안에 있다. 이곡에 주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까해서 내용을 소개한다. 가사는 한 쌍의 과학자들이 “전인류를 위해서(for the good of all mankind)” 죽음과 명예를 버릴 각오를 무릅쓰고 “그들에게 상이 될 그 치료제(the cure that is their prize)”를 찾으러 나서는 귀엽고도 긍지에 찬 이야기다(곡의 부제는 “Sacrifice of the New Scientists”라고 붙여졌다).

생활 속 거리두기가 예배에도 몇달 째 반영되고 있다. 교인 중 일부 참석자를 온라인으로 신청받았다. 나머지는 인터넷 예배 실황에서 만날 뿐이다. 참석자들에겐 일정한 참석 지침이 주어진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입구에서 열을 잰다. 열이 높은 경우 입장이 불가하다. 표시된 의자에만 앉을 수 있다. 양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당연히 마스크도 써야 한다. 당연했던 일상을 속절없이 앗아간 코로나19는 예배모임 속에서도 기세등등하다.

우리는 언제 끝날지 예측이 어렵고 어디로 번질지 통제가 쉽지 않은 이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거리두기 주일예배'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생활 속 거리두기의 연장을 실현할 조건들을 살피거나 인터넷 예배중계를 어떻게하면 좀 더 현실감 있게 할 수 있느냐에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익숙해져 있던 우리의 주일예배에서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작하게 된 작금의 상황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생각마저 든다. 다시 한 번 익숙한 예배가 아닌 진짜예배라는 예배의 본질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히브리서 13장에 보면 세가지 중요한 예배(제사로 표현됨)가 소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13:15-16)

그 중 하나는 예수로 말미암은 찬양의 예배였다. 이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해야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다. 그것은 예배는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요. 수평적으로는 세상을 향해 선포하는 공동체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고백하는 찬양의 예배에 익숙해져 있었다. 초대교회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을 결속시키고 늘 새로운 신앙의 활력소를 경험하는 자리가 있었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되며 오늘의 교회 역시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모임 속에 이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잘 정리된 예전예배라 하더라도 중요한 사실이 경험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비예전적인 예배 형태가 계속되었지만 당시 핍박과 고난 중에서도 생명력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독교 본질과 핵심적 가치가 반영된 예배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사실을 경험하고 증거하는 예배 그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양의 예배인 것이다.

이어진 말씀에 보면 두 가지 예배가 더 소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오직 선을 행하는 예배이며 또 하나는 서로 나누어 주는 예배이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와는 거리가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이 사실을 잊지 말것을 말하며 하나님은 이같은 예배(제사)를 기뻐하신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예배라고? 서로 나누어 주는 것도? 한국교회는 늘 예수 중심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찬양의)예배를 강조해 왔다. 어쩌면 지나치게 말이다.

그런데 정작 예배하는 것만큼 살아내지 못하는 신자들을 보고 있는 것이 뼈아픈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과 같이 강제로 진행되고 있는 거리두기 주일예배는 중요한 것을 되찾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강조하고 가르쳐도 믿음의 고백으로서의 예배가 회복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은 이어 소개한 선을 행하는 예배, 서로 나눠주는 예배가 강조되고 또 그렇게 살아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예배가 있는가? 우리 시대 한 목회자는 "이 시대는 위대하지 않은, 선한 그리스도인이 절실히 필요한 때다. 곤경에 처한 나, 이웃, 교회, 나라를 위해 기꺼이 기도할 수 있는 자, 따지지 않고  희생할 수 있는 자가 필요하다. 내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힘으로 남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하며 돕는 자들이 일어날 때,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믿는 BELIEVING(생각)에 그쳐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길인 BEING(실재)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위대한 삶이 아니라 선한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라고 외쳤다.

우리는 또한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에 기꺼이 나눌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나눔의 예배다. 내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진정으로 내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극복하기 쉽지 않지만 나는 그저 그것을 하나님께 위탁받아 관리하는 자라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각기 다르게 주신 소유의 목적은 이웃을 구제하기 위함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나뉘어지고 드려져야 한다.  소유의 기쁨은 잠시뿐이지만 나눔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기 떄문이다.

벌써부터 교회들은 앞으로 교인들이 얼마나 주일예배모임에 참석하게 될까 걱정하는 모습이다. 교회 재정에 큰 어려움이 생기지 않을까 고민도 보인다. 그러나 정말 고민은 우리의 예배가 진짜가 될 수 있을까 우리 교인들이 진정한 예배자가 될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위해 선을 행하고 희망을 보여주며 자신의 시간을 나누고 자신의 재산과 삶을 나누는 교회가 되고자한다면 우리의 고백은 세상을 울리는 능력 있는 선포가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거리두기 주일예배가 부디 유익한 경험과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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